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모스크바 공방전 (문단 편집) === 주코프의 역습 ===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Moscow-Battle.gif|width=100%]]}}} || || 진군하는 독일군에 맞서 반격하는 소련군 || 주코프는 섣불리 반격에 나서지 않고, 동부로부터 계속 도착하는 예비 병력을 집결시켜 역공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렇게 집결된 병력은 110만 명에 이르렀으나, 이는 독일군에 비해 조금 많은 정도였다. 구데리안이 멈춰 버린 12월 5일에 드디어 주코프는 공세로 나왔다. 소련군 부대는 동계 장비를 완비하고 있었고, 더구나 충분한 휴식을 취한 상태였으므로 헐벗고 굶주린 독일군은 도저히 이를 막아낼 수가 없었다. 독일은 이미 소련의 예비 병력이 소진되었다고 생각했으나, 그때까지 비교적 무명이었던 주코프의 거대한 물량 공세는 통렬했고 독일군의 전선은 곳곳에서 돌파당했다. 이 때 소련군은 기갑부대는 물론이고 [[공수부대]]와 [[스키]]부대까지 편성해 독일군의 보급망을 파괴하는 바람에 곳곳에서 독일군 부대들이 격파당하기 시작했다.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attachment/1310703481_a01.jpg|width=100%]]}}} || || [[방한복]]과 동계 위장복을 완벽히 갖춘 소련군[* 왼쪽에 있는 전차는 [[T-60]] 전차 이다.] || 여기서 강조해야 할 점은 소련군의 승리는 독일군 장군들의 회고록이나 [[냉전]] 논리 아래서 쓰인 전쟁사[* [[대한민국]]에서는 [[육군사관학교]]가 펴낸 "세계전쟁사"가 이런 식의 기술을 하고 있다.]들의 이야기처럼 단순히 날씨와 [[아돌프 히틀러]]의 실책으로 돌릴 수 없다. 물량의 우위와 치밀한 작전, 그리고 소련인들의 승리에 대한 의지로 이뤄낸 것이었다. 소련군은 독일군에게 참패했음에도 불구하고, 누적된 인구 소모가 극심해서 한계에 부딪친 [[독소전쟁]] 말기를 제외하면 독일보다는 인적 자원 면에서는 모자람이 없었으며 너도 나도 군에 지원하는 비율도 높았다. 애초에 전쟁을 3달 내에 끝낼 수 있다고 호언장담한 쪽은 바로 독일 군부였다. 초기에 독일 군부 장성 일부는 독소전쟁에 회의적이었지만 그렇다고 소련이 오래 버틸것이라고 생각하고 10주 안에 다 끝날수 있다고 장담한 바르바로사 작전 계획안에 태클을 건 사람은 없었다. 게다가 개전 이후 수백만 명의 포로를 잡으면서 승승장구하며 진격하자 진짜로 이 전쟁을 그 기간 안에 끝낼 수 있다고 믿어 버리고 만다. 물론 그 와중에도 독일의 피해는 착실히 누적되어 전례가 없을 정도로 막심해지고 있었다. 독일 중부집단군은 손해가 너무 막심해서 재편성도 할 겸, 역시 고전하던 남부집단군을 원조하기 위해 키예프 방면으로 돌려졌을 정도였다. 또한 기후 등에 대한 허술한 사전 조사는 병력의 속도를 늦추어 그만큼 독일을 더 불리하게 만들었다. 소련의 승리를 모두 동장군 덕분으로 치부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반은 맞지만 반은 틀린 말이다. 러시아인도 똑같은 인간인지라 특별히 추위에 강한 건 아니다. 다만 상대적으로 익숙하기에 대비를 잘하는 것 뿐. 그 소련군 역시 [[겨울전쟁]] 때는 [[핀란드군]]에게 죽은 수보다 얼어죽은 수가 더 많았다. 중요한 건, [[소련군]]은 동계전투를 위해 충분한 장비를 준비했지만 독일군은 수적, 질적으로 소련군보다 우위를 점했을지언정 그러한 우위와 전쟁에서의 주도권을 놓치지 않기 위해 이미 11월부터 진격을 중지해야 한다는 내부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공세종말점|한계]]를 훨씬 뛰어넘어 오버페이스로 달려온 것이다. 이는 겨울이 오기 전에 전쟁을 끝내야 한다는 강박과 "소련군은 이미 분쇄되었다"는 착각 속에서 이루어졌다. 실제로는 소련군은 건재했고, 또한 철저히 준비했으며 아직도 전력을 끊임 없이 증강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혹은 외면했던 것이다. 즉, 모스크바의 소련군은 필사적으로 전투를 벌였고 반면에 독일은 겨울이 오기 전에 전쟁을 끝낼 수 있다는 오만과 겨울이 오기 전에 전쟁을 끝내야만 한다는 강박이 결합하여 이러한 참패를 당했다. 모스크바 근방까지 도달했던 독일군은 동부전선에서 최초로 전략적인 차원에서 패배를 인정하고 물러나기 시작했다. 제2기갑군을 이끌던 [[하인츠 구데리안]]이 먼저 후퇴했고, 제2기갑군의 상급부대였던 제4군의 [[귄터 폰 클루게]]는 처음에는 그와 전화로 크게 싸웠으나 [* --이 때문에 [[결투]] 직전까지 갔다는 이야기도 있다.--클루게가 결투를 신청한건 구데리안이 클루게가 밀어붙이던 성채작전을 반대해 벌어진 일이다. 이후에도 두 사람은 견원지간이 된다.] 중부집단군 사령관 [[페도어 폰 보크]]는 집단군 전체를 150km 정도 후퇴시키기를 희망하였고 12월 14일에는 그 역시 총참모장 [[프란츠 할더]]와 함께 공식적인 후퇴 명령을 내렸다. 히틀러는 처음에는 보크의 주장대로 150km 정도 물러난 지점에도 마땅한 방어선이 없다는 점과 철수 과정에서 중장비의 상당수를 망실할 것이라는 점을 들어 거부하였으나[* 이 점은 히틀러의 망상이 아니라 후퇴를 요청한 보크 본인도 인정했던 부분이다.] 15일에 [[알프레트 요들]]을 통해서 제한적인 철수를 승인하였고 중부집단군은 모스크바로부터 100~200km 밖으로 후퇴했다. 한편 북부집단군을 지휘하는 [[빌헬름 리터 폰 레프]] 원수 또한 후퇴하여 방어선을 구축하기를 희망하였으나 히틀러는 이것이 레닌그라드의 포위가 풀리는 원인이 될 것을 우려하여 결정을 미루었다. 이에 레프는 독단적으로 후퇴를 진행시키는 한편 이를 숨기고 다시 후퇴를 요청하여 16일에 히틀러에게 후퇴를 승인받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